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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모두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김조은(대학생)


[사진1]Miksaliste센터가 열리길 기다리며, 난민들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Thank you! Thank you!(고마워요!)”

Šid(시드: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국경)로 갈 버스 안에서 연신 그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에게 또 내 옆의 동료들을 향해 고맙다고 외쳤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은 난민이다. 그들은 특히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또 그러한 이미지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여기저기 가지 못하는 신세인 ‘SIA(Syria, Iraq, Afghanistan)’난민이다.


운이 좋게, 저는 2015년 하반기 부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교환학생이 결정되고, 그 당시 가장 이슈였던 난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한국 미디어에서는 난민이 IS의 멤버일지도 모른다고, 한국 내에서도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저 또한 이런 미디어를 보면서, ‘! 중동 난민은 모두 테러리스트인가봐 .’ 라고 의심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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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와서도 계속해서 난민에 대한 기사를 꾸준히 읽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왜 유럽에서는 테러리스트일지 모르는 난민들을 돕자고 하는 걸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제로 제가 난민들을 보지 않으면, 또 난민들을 위해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을 보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행 버스를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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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3,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저는 곧바로 캠프로 향했습니다. 베오그라드 ‘Miksaliste’라는 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Miksaliste는 세르비아를 거쳐 크로아티아를 가는 난민들에게 위생용품, 음식, 따듯한 차, 옷과 신발을 나눠주고, 의료지원 샤워시설 지원을 해주는 센터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위생섹션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일 동안은 말 그대로, 위생섹션에서 할 수 있는 것만 정직하게 했습니다. 면도기 나눠주기, 아기 기저귀 나눠주기, 비누와 샴푸를 그들과 대화하지 않고 나눠주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위생섹션에서 몇 일을 일하고 나니, 위생섹션에서 필요한 아랍어들이 많이 익숙해졌고, 분배 일 또한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몇 번 마주친 난민들과 인사도 하게 되었고, 인도 자원활동 시절에 배웠던 힌디어와 우루두어로 난민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상을 쓰고 있다가도 우리와 인사를 할 때면 함박 웃음을 지어주었고, 우리에게 항상 윙크를 해주기도 하고, 또 엄지를 세워 최고라고 우리를 북돋아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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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센터에 갓 도착한 듯 한 난민이 위생섹션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 뜯어지고, 지퍼는 다 고장난 배낭에서 큰 바디워시를 꺼냈습니다. “고마워요. 저는 항상 여러분한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하는 일은 정말 좋은 일이에요. 이걸 다른 난민들과 나눠쓸 수 있게 여기 두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고, 위생섹션 책상에 큰 바디워시를 두고 가버렸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놀라웠고, 테러리스트 난민이라는 의심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베오그라드에서의 활동은 제 의심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채 베니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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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Dimitrovgrad 봉사자 집 문 한 켠에 붙어있던 글. 세계 각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바꾸는 많은 작은 일들을 해. 계속해서 좋은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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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로 돌아오고 나서 그 전보다 더 많이 난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캠프에서의 난민과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그럼 왜 내가 캠프에 있었을 때 아무도 캠프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나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난민들과 더 이야기 하지 못했을까?’, ‘다른 봉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봉사자들은 왜 테러리스트 난민들을 돕게 된걸까?’,’난민은 테러리스트일까?에 대한 답을 찾으러 떠난 캠프에서, 나는 왜 이리 소극적이었을까?’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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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난민 위기에 대해 편향적으로만 생각 할 것 같아 무작정 배낭만 싸서 이번엔 Dimitrovgrad 캠프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바보같이 시키는 대로만 있지 말고,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 꼭 찾고 와야지.’라는 마음으로. Dimitrovgrad캠프는 생각보다 더 절박했습니다. Dimitrovgrad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에 있는 캠프입니다. 밤이고 새벽이고 낮이고, 난민들은 캠프에 도착했습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모두 젖은 페딩과 모두 젖은 신발,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은 지친 것인지 울지도 않고 그냥 떨기만 하면서 어른들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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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캠프에서 하는 일은 베오그라드의 캠프에서 보다 좀 더 힘들고 혹독했습니다. 안타깝게 제가 일하는 기관은 캠프안에 들어갈 수 없어, 난민들이 경찰서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다른 국경을 향해 버스를 타기 직전에만 긴급담요, , 샌드위치, , 바나나를 빠르게 나눠 주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세르비아의 경찰 재량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나눠주지 말라며, 봉사자에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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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열악했던 국경의 캠프. 우리는 난민들이 캠프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버스에 타기 전 잠깐의 시간 동안만 물품을 나눠줄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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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saliste에서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저는 캠프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과 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간혹 서로의 영어에서, 서로의 우루두어에서 막히기도 했지만, 몸으로 표현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들의 힘들었던 여정, 그들이 떠나게 된 이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나라. 캠프에 도착한 직후에는 모두를 경계하며, 우리가 나눠주는 음식마저도 자기는 돈이 없다며 거절하던 사람들이, 캠프에 도착해서 따듯한 곳에서 한 숨 자고, 따듯한 샤워를 하고 햇빛을 조금 쐬고나면 캠프에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에게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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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은 SIA지역에서 터키 혹은 불가리아까지 대부분 걸어서 국경을 넘어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리아에서는 난민들을 위험요소라고 생각을 하고, 불가리아 경찰들이 난민들을 발견 즉시 감금을 한다고 했습니다. 감금 뿐 아니라 폭력, 고문 그리고 갈취도 한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일 놀랐던 부분은 몇날 몇일을 감금하다가, 가장 추운날이거나 비가 오는날 난민들을 불가리아 국경에서 세르비아로 넘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옷을 모두 벗기고, 그리고 난민들이 잠을 참고 국경과 산을 넘기 위해 챙긴 카페인 음료까지 모두 빼앗고 국경을 넘게 시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난민이 국경을 넘는 동안 뒤에 개를 풀어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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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 제 의심에 대한 조금씩 해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처럼 아니 나 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처럼 가족들과 행복하게 안전한 곳에서 살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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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자신들의 집과 조국을 떠나게 된 이유도 다양했습니다. 영국 회사에서 일을 해서, 탈레반이 위험인물이라고 지정해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가족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 집안의 수치이고, 탈레반의 규정에 어긋났기 때문에. 가장 편해야 할 집 근처에서 매일 총알이 날아들고, 폭탄이 터지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면서 까지 해야하는 힘든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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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과 거부감은 사라지고 동질감마저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나중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또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고, 난민들이 이렇게 목숨까지 걸며 전쟁이 없는 곳에 가려고 하는 것도 가족들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공통점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 둘의 작은 차이는, 나는 단지 운이 좋아 상대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고, 난민들은 단지 운이 나빠 상대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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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 수록 난민에게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연신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난민들에게 최종 도착지였던 독일은 계속해서 난민들을 추방하고 있으며, 도착지로 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던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불가리아는 이제 국경을 닫고 소수의 난민에게만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급박하게 변해버린 난민정책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국경에 오랫동안 정체되어있던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이해와 결속이 아닌 경찰과 군인들의 최루가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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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인권선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언론, 신앙의 자유, 결핍, 공포로 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꼐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난민들은 이 당연한 권리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고무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넘거나, 걸어서 국경을 넘으며 온갖 고난을 겪습니다. 난민들이 우리에게 온다고 해서 우리의 행복이 반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난민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우리가 난민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그들을 도와주지 않길 원합니다. 저의 경험을 기록한 이 글로 인해, 난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난민에게 관심을 가기 시작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사진4]세계 이민자의 날에Miksaliste의 봉사자들에 의해 진행된 프로젝트. “이주란 나에게 무슨의미일까?” 왼쪽 하단에 목을 맨 남녀 그림이 눈에 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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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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